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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소개

송현리(松峴里)

창녕읍의 동북부에 있는 송현동은 거대하고도 많은 수의 고분군(古墳群)이 있는 마을이다. 고분들만 보아도 사람이 오래 살아온 터전임을 알 수 있는데, 이곳은 창녕 읍내의 첫 동리라 할 만큼 유서 깊은 곳이다. 송현동은 ‘솔터’라고도 불리는데, ‘松’의 훈은 ‘솔’이고 그 어원은 ‘살, 사람, 삶(生)’을 뜻하므로 솔터는 곧 ‘사람이 사는 터전’이란 뜻이다. 행정리로는 송현과 대동 2개로 나뉜다.

교리(校里)

교리는 창녕향교가 있는 마을로, 향교가 있는 동리라 하여 교리 또는 교동으로 불리었다. 이 일대는 고분군이 널리 분포되어 있고, 특히 금관이 발굴된 고분이 복원되어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다. 또 교리는 신라 때 큰 절이 있었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군청 동편에 있는 창녕 인양사 조성비가 바로 그것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과 창녕 술정리 서 삼층석탑, 직교리당간지주 등도 절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행정리로는 교리, 갈전, 창서 3개로 나뉜다.

말흘리(末屹里)

말흘리는 창녕읍내 여러 마을 중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화왕산에서 자하곡을 따라 흐르는 창녕천이 종로와 만나는 남창교까지 잇는 선(線)에서 남쪽,관주산(貫珠山) 아래 여박골, 자련골과 그 아래 마을 상퇴천까지이다. 이곳에서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말흘리는 화왕산의 끝머리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끝 말(末)을 써 말흘리라 불렀다 하고 ‘머허리’라고도 한다. 말흘리는 신라 또는 고려 초기에 화왕군 또는 창녕군 현청이 있었던 곳으로 그 유적이 여박골 주변 과수원에 주춧돌로 남아 있다. 행정리로는 말흘, 낙영, 신당, 상퇴천 등 4개로 나뉜다.

교상리(橋上里)

화왕산 자하곡에서 흘러내리는 창녕천과 종로가 만나는 곳에 있는 다리를 남창교라 하는데 남창교를 경계로 하여 다리 위, 아래를 나누어 위 마을은 교상리이고 아래 마을은 교하리이다. 또 다리 위쪽 중 남창천 북쪽은 교상리이고, 남쪽은 말흘리이다. 교상리는 과거 창녕현의 관가(官家)가 밀집된 마을이었으나 한일 합방 이후 많이 훼손되어 지금은 옛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현재 교상리에는 창녕읍사무소를 비롯하여 창녕경찰서, 창녕군선거관리위원회, 창녕문화원 등 여러 기관들이 있으며, 만옥정 공원에는 국보 제33호인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를 비롯하여 퇴천삼층석탑, 창녕객사, 고인돌, 6·25한국전쟁 UN전승기념비 등이 있다. 행정리는 교상리 1개가 있다.

교하리(橋下里)

교하리는 남창교 아래에 위치하여 교하리라 하였다. 남창교 바로 아래 서편에 현청의 옥(獄)이 있었는데 이 옥은 장기수들을 수감한 현청의 외옥(外獄)으로 보이며, 옥이 있었다 하여 이곳을 옥동(獄洞)이라 한 것이 뜻이 좋지 않아 옥동(玉洞), 옥만동(玉萬洞)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행정리는 교하동, 옥만동, 학천, 봉천 등 4개로 나뉜다.

술정리(述亭里)

예로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라 창녕읍내가 선설(船說)로 ‘배’라고 하여 화왕산에는 배바우가 있고 이곳은 배를 매어 두는 마을이라 하여 계주말(繫舟洞), 지주말리라 하였다고 전해온다. 계주말의 계주는 선박이 안벽 같은 데 정박한 것을 말한다. 그 이후 계주말리가 술정리로 바뀐 것은 술정(述亭)이란 정자로 인하였다 한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한강 정구(鄭逑) 창녕현감이 현내에 8재(八齋)를 세우고 흥학교민(興學敎民)에 애썼는데 그때 세운 서재가 ‘술정’으로 하씨가의 정한강이 기증하였다고 한다. 술정리는 단일 행정리로 술정 1개가 있다.

직교리(直橋里)

직교리는 직다리라 부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직다리는 직달(直達)의 늘어진 형태로 보인다. ‘直’은 ‘바로’라는 뜻이며, ‘達’ 또는 ‘橋’는 ‘달, 들, 드르’의 음차, 또는 훈차로 보면 들[野]의 뜻으로 직다리, 직달, 직교는 ‘바로 (앞)들’이라 할 수 있다. 화왕산으로부터 흐르는 창녕천이 마을 가운데로 지나며 이루는 들판이 그야말로 곧바르게 환히 트여 있어 이를 직다리라 한 것이다. 창녕읍의 서쪽 입구인 직교리에는 당간지주가 서있는데 이는 신라 때 있었던 대사찰 인양사의 입구임을 말해 주고 있다. 직교리당간지주가 있는 곳으로부터 서편 고속도로 너머로 들이 펼쳐져 있고 최근 이 일대에 공장들이 많이 들어섰다. 행정리로는 직교, 직신 2개로 나뉜다.

조산리(造山里)

조산리는 창녕읍 시가지에서 바라보면 앞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동편에 있다. 조산리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자그만 산을 모았다하여 조산(造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만들었다는 산이 어디인지 분명치 않고, 조산으로 보이는 것은 성씨 재실인 송림재(松林齎)가 있는 동산인데 이 산은 천연적인 산으로 보여 확실치가 않다. 아마도 풍수지리설에서 뫼터의 앞쪽에 있는 산을 조산(朝山)이라 하고 혈(穴)에서 가장 멀리 있는 산을 조산(祖山)이라 하는데 조산리에 있는 산이 창녕 읍내의 앞산 격이라 ‘조산(朝山)’이 ‘조산(造山)’으로 변한 것이라 추정된다. 행정리로는 조산 1개가 있다.

도야리(道也里)

도야리는 창녕읍의 북부에 위치하며 가운데로 20호 국도가 지나가는 지역이다. 도야리는 디이불, 되불이라 불리었는데 디이불, 되불의 ‘디·되’는 ‘뒤(後)’이며, ‘불’은 ‘벌(伐)’로 들[野]의 옛말이다. 그러므로 디이불은 뒤에 있는 벌, 뒷벌이니 창녕현의 뒤에 있는 들이란 뜻이다. 도야리 마을 서편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으니 바로 이 들이 창녕읍내의 뒷들인 것이다. 행정리로는 도야 1개 리가 있다.

하리(下里)

하리는 도야리와 함께 본래 고암면 지역으로 역촌(驛村)이라 불리던 마을이었는데 1914년 군면 폐치분합 때 창녕읍에 편입되면서 하리라고 불리게 되었다. 화왕산과 목마산의 산자락에 있는 도야리가 동편으로 위쪽 높은 지대임에 비해 낮은 지대의 마을이어서 하동(下洞)이라 불리다가 하리가 되었다. 행정리로는 하리 1개가 있다.

퇴천리(兎川里)

창녕읍의 남부에 위치한 퇴천리는 본래 창락면이었고 창락면의 소재지가 있었던 곳이었다. 퇴천리 마을 앞을 흐르는 내의 이름이 퇴끼내였는데 이를 토끼 토(兎), 내 천(川)으로 기록하여 ‘兎川’이 되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이 토끼를 ‘이’첨가음으로 퇴끼라 발음하고, 한자 ‘兎’를 ‘토’라 하기보다는 ‘퇴’로 발음하는 것이 굳어져 한자로는 ‘토천리’라 쓰면서도 군내에서 사용하기는 퇴천리로 굳어져 버렸다. 행정리로는 퇴천 1개가 있다.

탐하리(呑下里)

본래 창락면 지역인 탐하리는 창녕읍의 남쪽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의 남쪽 마을이다. 마을보다 작은 몇 집이 모여 사는 곳인 뜸을 이곳 지방에서는 ‘담, 땀’이라 부르며 탐하는 담 아래란 뜻을 지니고 있다. 부르기에도 상담[上呑], 중담[中呑], 하담[下呑]으로 쓰니 ‘탐[呑]’은 ‘담, 땀’의 음차라 할 수 있다. 행정리로는 탐하 1개가 있다.

신촌리(新村里)

창녕읍의 서부지역인 신촌리는 새말이라 불리던 마을로 본래 창락면 지역이었다. 새말은 새로 된 마을이란 뜻으로 1914년 고리실[環谷], 지픈골, 회산 등을 포함하여 신촌리가 되었다. 몇 개의 마을이 합해져서 새로운 마을이 되었다 하여 신촌이라 한 것이다. 행정리로는 회산, 환곡 2개로 나뉜다.

용석리(龍石里)

용석리는 창녕읍의 남서부 지역으로 본래 창락면이었다. 『호구총수』에는 용석촌과 이교촌(泥橋村)으로 나오는데 1914년 2개 리가 합해지면서 용석리가 되었다. 이때 뒷개, 새말, 어섬, 진다리, 작다리, 학산 등의 자연 마을을 포함하여 법정리가 되었다. 산이 용의 형상이라 하여 용덤이라 한 것이 후에 용석리가 되었는데 이것은 용석리의 남부인 골용석, 양용석 두 마을이 있는 일대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행정리로는 어도, 이남, 학산 3개로 나뉜다.

외부리(外釜里)

가매실이라고도 불리었던 외부리는 본래 어촌면의 지역이었다. 지명이 가매실이라 불리는 곳은 대체적로 산이 주위를 빙 둘러싸서 분지를 이룬 지역으로 지형이 가마솥과 같이 생겼다. 외부리도 서편은 성지산, 남동은 등산 등의 산줄기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 마치 가마처럼 생겨 가매실이라 불렸다고 한다. 1914년 어촌면이 창락면에 합해 질 때 가매실의 내부곡촌과 외부곡촌도 합하여졌는데 이때 마을명을 내부곡으로 할지 외부곡으로 할지 주민들 사이에 말이 많았으나 결국 외부리로 결정하였다 한다. 행정리로는 외부 1개가 있다.

여초리(余草里)

여초리는 『호구총수』에 창락면 남통촌(南通村)으로 기록되어 있다. 풀이 많아서 여초라 하였다고 하나 그보다는 남통을 여통이라 기록하여 여통(余通)의 ‘余’와 초막골의 ‘草’를 합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통은 남쪽으로 통하는 곳이란 뜻이 있는데 여초리의 중심인 남통 마을 앞산이 여통산이며 이 산에 여통산 봉수가 있었다. 여통은 남통이 기록된 것으로‘남’을 ‘여’로 훈차하여 남통이 여통으로 된 것이다. 초막골은 6.25 전쟁 때 전투에 휘말려 큰 피해를 본 마을로 예전에 초막들이 있었다 하여 초막골로 불리었다 한다. 행정리로는 여초와 화전 2개로 나뉜다.

옥천리(玉泉里)

산이 수려하고 고찰(古刹) 관룡사가 있으며 계곡에 옥수가 흘러내리는 곳이 바로 옥천리(玉泉里)이다. 흔히 이 곳은 산옥정(山玉亭)이라 하였으며, 산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밖으로의 교통이 불편한 천옥(天獄)과도 같은 뜻으로 불린 것이 옥천으로 변하였다 한다. 행정리로는 옥천 1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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