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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소개

십이리(十二里)

십이의 십이(十二)는 이 일대의 뜸이 12땀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국도 5호선 개통과 함께 급성장하였으며, 태백산 동쪽 기슭에 자리 잡아 조선시대 양곡을 저장하던 사창(社倉)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합산 봉수가 있어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십이리에는 면사무소 외에 대합파출소와 우포농협, 대합우체국, 대합초등학교 등의 기관들이 있다. 행정리로는 십이리와 창곡 2개로 나뉜다.

등지리(燈旨里)

등지리의 본 마을은 무솔(武窣)마을로 임진왜란 때 마을 뒷산에 많은 군사가 진을 쳤다가 왜군과 싸웠으므로 무장한 군사들이 있었던 마을 이라는 뜻이다. 등지리의 마을 뒷산은 마치 말 안장과 같으며 무솔마을은 안장의 등자(鐙子)와 같아 ‘마치등’이라 불리었고 등자 등(鐙)이 등잔 등(燈)으로 변해 등산(燈山)으로 기록되었다. 지(旨)는 마을을 뜻하므로 등지(燈旨)는 등자(鐙子) 형국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행정리로는 무솔과 신안 2개로 나뉜다.

장기리(場基里)

장기리(場基里)는 구 개복면 지역으로 개복면사무소가 있었으며 개복장이 섰다고 한다. 장터는 개복의 동쪽이었는데 후에 장이 없어졌으나 장터라는 의미의 ‘장기(場基)’로 법정리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장기리의 매탄(埋炭)마을은 석탄(石炭)이 묻혀 있다는 설에 따라 마을 이름으로 불리었고 일제 강점기에 석탄을 캐려고 채탄작업을 하였다 한다. 장기리 서쪽에 중부내륙고속도로와 국도5호선이 통과하고 있으며, 행정리로는 율곡과 매탄 2개로 나뉜다.

모전리(茅田里)

모전은 본래 구 개복면 지역으로 뒷산이 소의 형국이며 그 소의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우미실(牛尾室) 마을의 소가 풀을 뜯어 먹는 풀밭이라 하여 띠방골로 불리었다. 띠방골은 떼밭골로 그 한자 표기가 ‘모전(茅田)’이다. 띠는 잔디의 일종으로 전에는 띠밭이 많았으니 이제는 대부분 개간되어 전답으로 변하였다. 이곳은 중부내류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곳이며 국도5호선도 겹쳐진 들판으로 옥토가 펼쳐진 마을이다. 행정리로는 모전, 수장, 석실 3개로 나뉜다.

소야리(所也里)

소야리는 본래 구 대곡면 지역으로 대합면의 남부이다. 소야라 불리게 된 것은 400여 년 전에 이 마을에 효자가 많이 나서 효야촌(孝也村)으로 불리던 것이 이곳 지방 사람들을 효자를 ‘소자’라 발음하였기 때문에 소야로 쓰게 되었다 한다. 그 당시 마을 앞이 풀밭이었으므로 ‘바 소(所)’, ‘들 야(野)’로 기록하였다가 그 후 ‘野’는 다시 ‘이끼 야(也)’로 변한 것이다. 행정리로는 소야와 월령 2개로 나뉜다.

주매리(主梅里)

주매리는 옛 대곡면 지역으로 대합면의 남부에 있다. 매화가 많이 있어 주매라 하였다 하나 ‘앞들, 앞동리’를 뜻하는 ‘임불’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주(主)의 훈이 ‘임’이고 이는 ‘앞’을 뜻하며, 매(梅)는 산의 옛말 ‘뫼’가 음차 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이는 곧 ‘앞산’의 뜻으로 볼 수 있다. ‘임불’ 앞들을 말하며, 대합면 일대가 군용지로 징발될 때 강제 퇴거의 고난을 겪었으며, 6·25동란 때는 격전지로 전쟁의 참화를 크게 입었던 마을이기도 하다. 행정리로는 주매 1개가 있다.

신당리(神堂里)

신당리는 본래 대곡면의 지역으로 대곡면의 소재지가 있었다. 신당은 예전 창녕 조씨들의 세거지였었다. 고려말 조민수 장군이 이성계 일파의 미움을 사 귀양을 오게 되었고, 후에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후 재산을 몰수하고 집터는 못을 파게 하는 형벌을 시행하여 새로운 못이라는 뜻으로 신당(新塘)으로 불리어졌다고 추측된다. 이후 뜻이 별로 좋지 않으므로 신을 모시는 당집이 많다는 현재의 신당(神堂)으로 고쳐졌으리라 추측되나 마을에서는 그저 “하룻밤 사이에 큰 못이 생겨 신당(新塘)이라 했다”고만 전해온다. 2013년 경상남도기념물 제282호로 지정된 창녕 창성부원군 조민수의 묘가 있다. 행정리로는 신당 1개가 있다.

퇴산리(兎山里)

퇴산은(兎山)은 앞산이 토끼가 달을 보는 형국으로 토끼등이라 불리는 데서 왔다. 그리하여 한자로 토끼 토(兎)를 써써 토산리(兎山里)로 쓰나 이곳 지방 사람들은 속음(俗音)으로 ‘兎’를 ‘퇴’라 함에 따라 퇴산리라 부른다. 일부 지도상이나 외지의 서책에는 토산리로 쓰이고 있다. 왜정 때 이 근처 구도개 등 마을들이 군용지로 징발되자 그곳 사람들이 퇴거당하여 이곳으로 와서 살았었다. 행정리로는 퇴산, 월계 2개로 나뉜다.

평지리(坪旨里)

평지리는 본래 합산면으로 대합면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있다. 합산면의 면소재지였으며, 대합면이 되고 난 이후에도 몇 년간 면사무소가 있다가 수년 후에 십이리로 나갔다 하니 이곳은 옛 대합의 중심부라 할 수 있다. 마을 앞뒤에 넓은 들이 있어 들가운데 마을이라 하여 들마을-들말이라 불리었다. 앞뒤에 넓은 들을 가진 마을이라서 들말, 평지(坪地)라 한 것이다. 행정리로는 평지, 합산, 모지 3개로 나뉜다.

도개리(道介里)

도개리(道介里)는 본래 대곡면의 지역으로 뒷산이 복숭아처럼 생겨 ‘도개(桃介)’라 하였다가 일정 때 도개(道介)로 개칭되었다. 대합면의 중부지역으로 일정 때 군용지로 징발당한 곳이어서 마을이 옮겨져 구도개, 신도개가 있다. 행정리로는 도개 1개가 있다.

내울리(內亐里)

내울(內亐)이라 하면 ‘울기의 안(內)’이란 뜻으로 ‘울기’는 마을이 우렁이(소라)처럼 생겼다 하여 붙은 명칭이다. ‘우렁이-우기-울기’로 변하여 부른 것을 한자로 기록하면서 ‘울(亐)’로 음차한 것으로 보인다. 행정리로는 계동과 옥산 2개로 나뉜다.

대곡리(大谷里)

옛 대곡면의 이름이 되었던 마을로 대곡(大谷)은 글자 그대로 큰 골짜기를 뜻하며 대합면의 서부로 넓은 들이 펼쳐진 곳이다. 대곡면 시설에는 이곳에 대곡면사무소가 있었다. 행정리로는 대곡 1개가 있다.

목단리(牧丹里)

목단리(牧丹里)는 경상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대합면의 최북단으로 창녕군 및 경상남도의 북단이기도 하다. 구미, 목단, 유산 세 마을이 모두 대구광역시와 경계 지점에 위치하여 마을 내의 골목이나 개울을 사이에 두고 경계가 지나간다. 그래서 하나의 마을 안에 경상남도와 대구광역시가 같이 있는 곳이라는 특색이 있다. 이에 목단(牧丹)이라는 명칭도 모퉁이를 가리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모란이, 모랭이’는 모퉁이를 가리키는 이곳 지방말로 모랭이가 모란꽃과 그 음이 같으므로 목단(牧丹)이라 음차된 것이다. 행정리로는 목단, 유산, 구미 3개로 나뉜다.

이방리(伊方里)

이방(伊方) 본래 합산면으로 북쪽 모퉁이의 바깥 마을로써 외방(外方)이라 하였고, 이를 조금 멀리 있는 ‘저기 저 마을’의 뜻으로 ‘이방(伊方)’으로 기록하였다. 행정리로는 이방과 월포 2개로 나뉜다.

합리(合里)

예전 합산면의 지역으로서 전에 학이 잘 앉았다는 학무대(鶴舞臺) 바위와 산이 있어 ‘학골(鶴谷)’이라 하였다가 뒤에 ‘합골(合谷)’로 바뀌었다고 전하나 대합면의 주산인 태백산의 또다른 이름인 합산(合山)아래에 위치하여 합리라 불리게 되었다고 본다. 남쪽과 북쪽 산등에 삼국시대에 것으로 알려진 합리 고분군(古墳群) 50여기가 분포되어 있다고 알려졌으나 현재 5기 정도만 남아 있으며, 이것도 대부분 도굴, 붕괴된 상태이다. 대체적으로 횡구식 석실고분으로 이 고분군을 보아서 대합면 내에서 이곳이 제일 먼저 이룩된 마을로 볼 수 있다. 행정리로는 합리와 용산 두 개로 나뉜다.

대동리(大同里)

대동(大同)은 중부내륙고속도로 서편 구릉지대에 자리 잡은 마을로 큰 동리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때 군용지로 편입되어 다른 마을로 이주했다가 해방 후 복귀했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으며, 대동리의 문화재로 경상남도유형문화제 금호재와 창녕대동리금헌묘석상이, 경상남도문화재자료로 금헌이장곤묘도비가 있다. 행정리로는 대동리 1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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