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카오스토리 담기
  • 구글플러스 담기
  • 링크 주소 복사
  • 본문 인쇄

마을소개

부곡리(釜谷里)

부곡리는 덕암산 아래 마을로 가매실이라 불리는 데서 비롯되었다. 이 일대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지형이 마치 ‘가매(가마의 이곳 지방 말)’같이 생겼다 하여 ‘가마(釜) 골(谷)’이라 쓰게 되었다 한다. 행정리로는 원동, 부곡 2개로 나뉜다.

거문리(巨文里)

거문리는 영산방향에서 부곡면의 첫머리에 있다. 뒷산 종암산이 검다하여 ‘거문듬’이라 한다거나 한자 뜻 그대로 대문장가가 많기에 ‘거문리(巨文里)’라 한다는 설들이 있으나 동북쪽의 덕암산과 서북쪽의 종암산이 모두 ‘감’계 지명을 가진 신령한 산들로 신(神), 왕(王)의 뜻을 가진 옛글인 ‘감’이 ‘거문’으로 호전(互轉)된 것을 한자로 쓰면서 ‘巨文’으로 음차한 것이다. 행정리로는 거문과 대신 2개로 나뉜다.

사창리(社倉里)

사창리는 영산-밀양간 도로에서 남쪽편의 마을이다. 조선시대에 정부가 민간으로부터 거두어들인 조세양곡을 보관하던 큰 창고인 사창(社倉)이 있었고 관서의 이름이 그대로 지명으로 된 것이다. 옛날에는 낙동강물이 온정천을 통하여 온정리와 사창리에까지 들어와 배가 다닐 수 있었다 한다. 행정리로는 사창 1개가 있다.

온정리(溫井里)

온정리의 옛 이름은 ‘구리방(九禮)’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는 원정이라 했다고 한다. 온정역이 있었던 곳으로 남쪽으로는 임해진 나루로 통하였고 육로나 해로의 길목이었으므로 육상교통의 요지로서 역이 있었던 것이다. 행정리로는 온정 1개가 있다.

청암리(靑岩里)

청암리는 조선시대부터 구리광산으로 유명하였던 곳이다. 뒷산인 청암산이 푸르고 바위가 많아서 ‘청암(靑岩)’이라 불렸다는 유래가 있으며, ‘청(靑)’은 이곳에서 생산되었던 청동(靑銅)에서 비롯되었다 보인다. 청의장군(靑衣將軍)의 설화가 구전되고 있다. 행정리로는 청암과 차실 2개가 있다.
※ 청의장군 설화 : 청의장군은 청암산에 살았던 키가 구척이고 힘이 장사일 뿐만 아니라 무예와 도술을 자유자제로 부리는 사람이라 모두들 장군이라 불렀다 한다. 장군은 자기의 때가 오기를 산속에 숨어 기다리며 무술을 연마하고 부하들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도사가 이 근처를 지나며 산세를 보고 장차 나라에 역적질을 하고 소란을 일으켜 나라를 어지럽힐 사람이 날 것이니 미리 예방을 하여야 한다고 조정에 알렸다. 나라에서는 그 도사의 말만 듣고 산 정상에서 뻗어 내려오는 산줄기 하나를 잘라버리라고 관헌에 명령했고 관헌에서는 산줄기의 땅을 깊이 파고 숯불을 몇날 며칠을 피워 산의 푸른 정기를 말리려고 하였다. 결국 산등을 파고 불을 지르니 산줄기에서 백마가 날아 나와 남쪽으로 날아가 대밭골 뒷산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 백마는 청의장군을 태우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며 큰일을 하게 할 말로 땅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 산줄기에 백만 대군이 숨어있었는데 숯불에 모두 타 죽고 말았다. 청의장군 또한 백마도 군사도 잃고 나라를 위해 큰일을 못하고 죽고 말았다 한다.

노리(魯里)

노리는 들판을 건너 낙동강을 바라보는 돌굿봉 남쪽 골짜기 안에 자리한 마을로 서쪽은 임해진으로 개비리 절벽으로 막혀 있고 남쪽은 학포리와 이어져 있다. 노리에 학포로 물이 흐르는 곳이라 벼농사가 잘 되는 논이 많아 ‘논실, 놀골’이라 불리었으며 한문으로 옮기면서‘논’이‘노(魯)’로 음차되어 ‘노리(魯里)’라 불리었다. 행정리로는 노리 1개가 있다.

학포리(鶴浦里)

학포리는 창녕군의 제일 남단에 위치한 마을로 앞은 낙동강이며, 뒤에는 비룡산이 솟아 있다. 학포라 부른 것은 앞새개 마을과 낙동강 등에 학이 많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행정리로는 신포와 후포 2개로 나뉜다.

구산리(九山里)

구산리는 마을의 뒷산의 형상이 거북처럼 생겼으므로 ‘구미(구뫼, 거북뫼, 龜山)’라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거북 구(龜)’를 쓰기 쉬운 ‘아홉 구(九)’로 바꿔 ‘구산(九山)’이 된 것이다. 행정리로는 구산 1개가 있다.

비봉리(飛鳳里)

비봉리는 인교에서 서쪽으로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월봉산 아래에 있다. 비봉은 곧 월봉산이 봉황새가 나는 것과 같은 지형이라 ‘비봉(飛鳳)’이라 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장차 큰 인물이 탄생할까 두려워 ‘비공(飛孔)’이라 바꾼 것을 1983년도에 옛 지명을 되찾자는 여론에 의해 원래의 지명인 ‘비봉(飛鳳)’으로 환원하게 되었다. 행정리로는 비봉 1개가 있다.

수다리(水多里)

신라시대부터 수다이소(水多伊所)가 있었던 곳이므로 수다리라 불리고 있다. 소(所)는 기술적인 기능의 소유자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이곳에는 최근까지 옹기를 만드는 옹기굴이 있고 점촌이라는 지명도 남아 있어 수다이소는 도자기를 만들던 곳이라 추측된다. 수다리라는 지명은 아주 오래된 것으로 일대가 저지대로 물이 가득하여 예전에는‘물안이’라고 하였으니, ‘물’은 ‘水’로 훈차되고 ‘안이’는 ‘多伊’로 음차되어 ‘수다이소’라 불렸을 것이다. 행정리로는 수다와 수성 2개로 나뉜다.

OPEN 출처표시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1유형 :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사진, 이미지, 일러스트, 동영상 등 일부자료 제외)

담당부서
부곡면 총무담당(☎ 055-530-7061)
만족도 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만족도조사 참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