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포늪소개

우포늪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1만5천년 전 빙하기가 최대였을 때 해수면(바다의 수면)은 지금보다 100m 이상 낮았다. 이때 남해바다는 낙동강 하구에서 60㎞나 떨어져 있었고 낙동강과 우포늪은 폭이 좁고 깊은 골짜기였다. 골짜기의 깊이는 퇴적암층이 누워있는 지하 10m였거나, 또는 그보다 훨씬 깊었을지 모른다.

빙하가 녹기 시작하면서 1만년 전에는 바닷물이 현재의 해수면보다 25m 아래, 8천년 전에는 10m 아래까지 차 올랐다. 바닷물은 6천년 전에서야 현재의 높이에서 안정된다. 빙하가 녹으면서 육지의 골짜기였던 낙동강 계곡으로도 바닷물이 들어와 낙동강 하구에서 160㎞ 떨어진 경북 고령군 88고속도로 고령교(88고속도로)까지 바닷물이 넘실댔다. 낙동강은 이때 강이 아니라 내륙의 좁은 만(灣)이었다.

평야면과 토평천하상의 지형종단면

평야면과 토평천하상의 지형종단면-하류인 낙동강이 중심이 되고 자연제방은 퇴적물이 높게 쌓여 해발고도가 14~17.5m로 나타나 있다.반면 우포는 낙동강 본류에서 동쪽으로 7km 떨어지 위치하고 해발 고도가 9.6m 이다.

바닷물이 들어오기 전까지 홍수가 나면 골짜기 상류에서 낙동강을 따라 흘러내린 돌과 흙이 지리산 계곡에서처럼 계류에 실려 멀리 옮겨졌다. 그러나 바닷물이 들어온 뒤에는 좁은 만의 바닥에 쌓였다. 이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점차 바닥이 해수면보다 높아지고 그 사이를 따라 강이 흐르게 됐다. 이후 강의 양쪽에 모래와 흙이 쌓여 비옥하고 넓은 둑(자연제방)을 만들었다.

현재 우포는 낙동강 본류에서 동쪽으로 7㎞ 가량 떨어져 있다. 화왕산에서 시작해 창녕읍을 지나온 토평천이 이 늪으로 흘러 들어왔다가 낙동강으로 빠져나간다. 그러나, 토평천이 우포늪으로 실어온 흙과 모래의 양이 그렇게 많지 않아 해발 고도가 9.6m인 반면, 하류인 낙동강 쪽 자연제방은 홍수 때 실려온 퇴적물이 작은 동산처럼 높게 쌓여있다(해발 14~17.5m). 홍수가 나면 낙동강물이 우포로 역류하고 평상시에도 배수가 원활히 이뤄지지 않아 이 일대는 물이 고여있는 늪이 됐다.

문헌기록과 우포늪의 변화

우포라는 이름이 기록에 남아있는 제일 오래된 것은 도호(道湖) 노주학(盧周學) 선생의 문집 화왕산유람기에 선생의 일행 선유들이 우포를 지나 화왕산으로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김호익, 2018, 창녕우포늪 전자문화지도 페이지 154~155에서 인용)

"1810년 3월 15일에 복숭아꽃이 만발하고 봄옷이 당지어진 이 같은 좋은 때에 어찌 바람을 쐬고 돌아오지 아니하리오? (중략) 우포 소맥산(小麥山)을 지나 아래로 탄원(지금의 탐하) 안산에 다다라 꿩 6마리를 잡아 퇴천 주막에 들어가니 약속한 친구들이 이미 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원문 도호(道湖) 노주학(盧周學) 선생의 문집 "화왕산 유람기"

가장 오래된 지리지(우리 나라의 땅 그림)인 세종 때의 경상도지리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소하천이나 소택지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수 없다. 성종조(1477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창녕현편에 물슬천(勿瑟川), 이지포(梨旨浦), 누구택(樓仇澤), 용장택(龍壯澤)의 기록이 나오고 순조조(1832년)에 편찬된 경상도읍지에도 같이 기록되어 있으며, 철종조에 편찬된 대동여지도(김정호, 1861년)에는 물슬천과 이지포는 지도에 나타나 있으나 누구택 대신에 누포(漏浦)라는 지명이 나와 있다.

이들 지리지에 나오는 지명은 동국여지도, 경상도읍지의 창녕현지도 및 현지형도를 근거로 분석해 보면 물슬천은 지금의 토평천이며 용장택은 현재는 개간되고 없는 대합면에 있던 용호를 지칭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지(梨旨)라는 지명은 토평천 하류부 성산리에 이지(梨旨) 혹은 배말리라는 지명이 나타나 있으나 현재 이 위치에는 소택지가 없다.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누구택과 대동여지도의 누포는 그 위치가 현 우포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조선시대가 끝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일제에 의해 지명들이 개정되고 우포, 목포, 사지포로 명기되어진다(현지 주민들은 지금도 소벌, 나무벌, 모래벌로 지칭한다). 1918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50000:1 실사지도가 만들어지고 지금과 같은 지명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다행히도 우포늪 주변의 원형을 볼 수 있다. 또 같은 해에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지지(地誌) 자료에는 '창녕에는 천지를 제외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큰 우포가 있다.' 는 기록이 있다(한국문화연구 · 부산대). 그리고 일제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1933년 '보호사적에 관한 법률' 을 만들고 우포를 천연기념물 15호로 지정하여 보호하였다.

  • 도호 노주학 선생의 문집-화왕산 유람기도호 노주학 선생의 문집-화왕산 유람기
  • 경상도읍지(순조,1832년) 창녕읍 산천경상도읍지(순조, 1832년) 창녕읍 산천
  • 대동여지도(김정호, 1861년)대동여지도(김정호, 1861년)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포늪은 큰 변화를 맞게된다. 지금의 우포늪 동쪽에 있는 대대제방을 축조하여 대대들을 개간하여 우포늪은 3분1가량 줄어들게 되고 제방을 만들어 홍수피해가 전보다 줄어들자 마을 뒷산 기슭에 동네를 이루고 살던 대대리 주민들도 그 아래 평평한 곳으로 대부분 내려와 살게된다.

광복이후, 1962년 12월 백조(고니) 도래지로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오다가 1973년에 백조(고니)가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천연기념물 지정이 해제되면서 우포늪은 또 한번의 큰 변화를 겪는다. 도시의 산업화와 농경지 확장사업이 본격화되면서 낙동강과 토평천에 제방이 만들어지고 주변의 우포늪과 같은 사몰포, 용호 등과 크고 작은 대부분의 늪지들이 농경지로 변하였다.

이때부터 지역주민들과 환경운동 단체와 정부의 갈등이 있게된다. 이용과 보전이라는 측면에서 지역주민들은 어로와 대칭이, 고동 등을 채취하여 생활해 온 삶의 터전을 잃을 것을 우려했고 환경단체는 보호구역 등을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 번의 공청회와 대화를 통하였고, 환경부는1997년 7월 26일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하였고, 이듬해인 1998년 3월 2일에는 국제협약인 람사르협약에 등록하고, 1999년 2월 8일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정부는 습지보호지역 내에서 농사를 짓던 사유지 20만평을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매입하고 환경감시원을 두어 차량의 진출입을 통제하고 불법어로와 환경감시를 하고있다. 현재 우포늪이 속해있는 창녕군은 물론, 지역주민과 민간환경단체들도 우포늪의 보전과 관리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소벌, 나무벌, 모래벌, 쪽지벌은 현지 주민들 사이에 불려지는 이름으로 우포, 목포, 사지포는 이를 한자로 바꾼 것을 알 수 있으나 문헌에 나오는 이지포, 누포 등과는 연관성을 알아내지 못했다. 좀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될 것으로 보여진다.

  • 1918년 조선총독부 지도 상 위치1918년 조선총독부 지도 상 위치
  • 1963년 국립건설연구소 지도 상 위치1963년 국립건설연구소 지도 상 위치
  • 1993년 국립지리원 지도 상 위치1993년 국립지리원 지도 상 위치

인용자료

  • 土坪川 沿岸 沖積平野의 地形發達 (申潤鎬, 1983년, 경북대 석사학위논문)
  • 우포늪 넓게 보기 (송동운기자, 국제신문기사, 2001.5.14일부터 4회)
  • 창녕군지 (창녕군, 1984년)

자료제공 : 부산대학교 주기재 교수


담당부서
우포생태따오기과 생태정책팀
문의
055-530-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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