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계, 보름, 寶林(보림)) 9개의 내와 골짜기가 있어 구계리라 하였으며 이 골짜기에 보림사 등 9개의 절과 8개의 암자가 있어 보림이라 했는데 일제 시에 구계리로 개칭되었다. 三災九難(삼재구난)이 없는 곳이라 전해와 6.25 동란 때도 피난지였다.
영산향교가 있는 마을이므로 교리라 한 것이다. 영축산성을 오르는 입구는 영산신씨(靈山辛氏)의 오랜 세거지로 시조를 모시는 대종실이 있다. 신씨 부호의 옛 영화를 말해주는 전통 한식 기와집이 많아 옛 가옥의 배치와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 이들의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행정리로는 교리 1개가 있다.
영산읍성(靈山邑城) 안이라 하여 성내리(城內里)라 불리어진다. 성안에는 영산현의 관아가 있었는데 한일합방과 해방 등 격동기를 거치는 동안 성벽과 관아의 건물들은 거의 훼손되어 버리고 그 터만 남아 있다. 조선시대 시작된 5일장이 오래전부터 시작되어 상거래의 중심지로 발달된 곳이다. 행정리로는 성내리 1개가 있다.
영산성의 안을 성내리, 성의 바깥을 성외리(城外里)라 하였는데 조선 후기에 와서 성외리가 큰 마을로 발전하자 이를 동, 서로 나누어 동동, 서동으로 불리어졌고 후에 동리와 서리가 되었다. 영산면사무소가 있으며, 행정리로는 동리 1개가 있다.
영산읍내의 성외리 중 서쪽에 있는 마을이므로 서리(西里)라 하였다. 전에 면사무소가 있었던 일대로 못 가운데 5개의 섬과 항미정(抗眉亭)이 있어 경치가 아름다운 연지(硯池)못이 있다. 행정리로는 서리 1개가 있다.
죽전리(竹前里)와 사라리(紗羅里) 두 마을이 1914년 군면폐치분합에 따라 합하여진 것이다. 이때 죽전의 죽(竹)과 사라리의 사(紗)를 합해 죽사리(竹紗里)가 되었다. 행정리로는 죽사1구, 죽사2구 2개로 나뉜다.
영산면의 허리 부분으로 남북은 도천면과 계성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임진왜란 직후에 판 못 아래에 있는 마을이므로 새못(新堤)이라 불리었다. 행정리로는 신제1구, 신제2구, 신제3구 3개로 나뉜다.
넓은 들판을 안고 있는 큰 마을인 월령리는 1914년 당포리를 합하여 월령리가 되었다. 마을이 76.3m 높이의 산 둘레에 형성되어 있으며 이 산이 마치 달처럼 둥글게 생겨 ‘달의 산’이란 뜻의 ‘달재, 다재(月嶺)’로 불리었다. 행정리로는 월령1구, 월령2구 2개로 나뉜다.
1914년 작포(鵲浦)와 둔암(屯岩)이 합하여져 두 마을의 글자를 하나씩 따서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 그런데 작포의 ‘까치 작(鵲)’이 어렵고 한자 획수가 많으므로 같은 새 종류이며 까치보다는 봉황새가 더 좋다하여 ‘봉새 봉(鳳)’을 사용하여 봉암리(鳳岩里)가 되었다. 행정리로는 작포, 둔암 2개로 나뉜다.